포스팅을 참 오랜만에 합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네요. 팀원 중 한 사람이 갑자기 퇴사 통보하는 바람에 계획에도 없던 휴가를 급하게 내면서 정말 아무 것도 안하는 '휴식' 그 자체를 즐기기도 했고, 복귀하고 나니 그 빈 자리가 엄청 크게 느껴지네요. 일이 많았습니다 이래저래.
휴일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다시 미생을 정주행 합니다.
김 대리, 동식이가 오 과장에게 깨지고 있네요.
상식 : 아니, 실수라곤 도통 모르던 놈이 어쩌다 그랬어?
동식 : …
상식 : 중국 딜레이 건으로 정신 없었던 거 알아. 근데, 여러 번 얘기 했잖아. 너, 나 둘만 하는 일이라 일당백이어야 한다고.
동식 : 그게 사실 그게, FTA 발효 전이라 제가 체크를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을 장그래가 지켜봅니다.
그래 : 저기 석호 씨, 우리 팀 무슨 일 있는지 알아요?
석호 : 난리 났었어요. 김 대리님이 진행하시던 극세사 먼지떨이 수출 건이요. 이제 와서 바이어 쪽에서 한-EU FTA 조건에 맞춰달라고 했대요. 구두계약 때 잠깐 나온 얘긴데, 김 대리님이 듣고도 놓치셨나봐요. 한-EU FTA 정식 발효 전이니까, 크게 고려하지 않으신거죠.
그래 : 아… 근데, 제가 알기론 그거 선적 끝나서 내일 아침에 배 뜨는데.
석호 : 그러니까요. 근데 막무가낸가 봐요. 원산지 증명서 첨부해서 계약된 날짜 안에 인도 안되면 계약 무효화 한다고…
난리 난 상황이네요. 바이어 입장에서 한-EU FTA의 영향으로 관세혜택을 받고 싶은게 당연하겠죠. 이건 철저하게 챙기지 못한 동식이의 잘못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시점이 좀 이상한데요?
장그래를 포함한 인턴들이 최종 PT 자료를 낼 때 모습입니다.
저기 접수대에 분명히 "2012년도 원인터내셔널 신입사원 PT면접 접수처" 라고 적힌 거 보이죠?
한-EU FTA는 2011년 7월 1일 자로 발효되었습니다. 이상하죠? 분명히 위의 대화에서 FTA 발효 전이라고 했는데 2012년 이라니요.
현직자 눈에만 보이는 옥의 팁니다. 드라마 작가들 입장에선 '시청자가 그 정도 세부적인 것 까지 따지겠느냐...'고 생각할 만 하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운건 사실입니다.
한-EU FTA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8년 반 쯤 전, 저는 영국에 있었어요. 교환학생의 자격으로 말이죠. 제가 듣던 수업 중의 하나가 'Introduction to the European Union' 이라는 이름의 과목이었습니다. 담당 교수님은 '넌 교환학생이니까, 특별히 시험을 면제시켜줄게. 대신 지금 내가 주는 인스트럭션에 맞게 리포트를 하나 제출해 줘.' 라고 하시며 부담을 엄청 덜어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썼던 레포트는 (물론 영어로 썼겠지만) '한-EU FTA의 단기적 효과 및 중/장기적 효과' 라는 제목이었습니다. 2010년 초였는데, 그 당시에 한국 국회에서 한-EU FTA가 비준되었거든요. 비준이 됐다고 바로 발효되는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생각하고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그 때, EU에서 크게 수혜를 볼 수 있는 품목으로 돼지고기 (Samgyeopsal 이라고 이텔릭체로 쓰고 주석에 Pork belly라 썼던게 생각납니다)와 자동차 라고 썼던걸로 기억합니다. 우연의 일치 일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날이 2011년 7월 1일입니다. 이 때까지는 몰랐죠. 제가 그토록 많은 양의 유럽향 선적서류를 상대하게 될 것이라고는.... 신입사원 1년 시절 동안, 제가 맡은 아이템의 주된 수출 시장이 유럽과 중동이었습니다.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결국 원인터 영업3팀은 힘들게 힘들게 (그리고 비용이 추가되면서) 한-EU FTA에 부합한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아 무사히 체코로 수출을 완료하게 됩니다.
위의 사진을 보면 문서의 제목이 '품목별 원산지인증수출자 인증서' 라고 되어있죠?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정말 감탄한 것들 중 하나가, 실무에서 사용하는 서류를 정말 똑같이 옮겨놨구나...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챙겼다는 점이에요. 저 프린팅 되는 서류, 실제 세관에서 발행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보면서 (옥의 티 까지는 아니지만) 좀 아쉽다 싶은 부분이 하나 더 생깁니다. FTA를 적용하기 위한 과정들과 그 서류들을 잘 알고 있다면, 제가 왜 아쉽다고 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 한-EU FTA에 대해서만 설명을 할게요. 한-EU FTA 협정서 전체를 읽어본 분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업무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읽게 되었죠....ㅠㅠ) 이 협정서에는 각 품목별로 관세율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각 품목들은 저마다의 고유 코드가 있는데요, 우리는 이걸 HS 코드 (세관부호, Harmonized Commodity Description and Coding System Code) 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10자리를 기준으로 얘기하고 있구요, 국제표준으로는 보통 6자리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뒤의 4자리는 세부 구분을 위한게 되겠죠?)
예를 들자면, 과거 2G 시절 사용하던 CDMA 방식의 휴대전화 HS 코드는 8517.12.1090입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느끼셨겠지만 10자리 중간 중간에 점(.)이 찍혀있습니다. 이게 각각 대분류-중분류-소분류를 구분하기 위한 것인데요.
8517 : 전화기(셀룰러 통신망이나 그 밖의 무선통신 망용 전화기를 포함한다)와 음성, 영상이나 그 밖의 자료를 송신용, 수신용 그 밖의 기기(근거리 통신망이나 원거리 통신망에서 통신하기 위한 기기를 포함하며 제8443호, 제8552호, 제8527호, 제8528호의 송신용, 수신용 기기는 제외한다)
두 번째에 해당되는 12는 '셀룰러 통신망이나 그 밖의 무선통신망용 전화기'를 설명하고 있구요,
세 번째의 4자리 같은 경우는 아래와 같이 정의됩니다.
10 (이 경우는 8자리까지만 쓸 때) : 코드분할다중접속을 사용하는 동기식
1010 : 디지털 방송수신이 가능한 것
1090 : 기타
HS코드에 따라 관세율이 달라진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고, 한-EU FTA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이게 한국에서 제조되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굉장히 귀찮고 복잡하고 짜증나는 작업인데요 (게다가 2~3년마다 한 번씩 갱신합니다. 굉장히 귀찮아요) 이를 위해 완성품의 제조에 쓰인 모든 원재료의 명세서와 그 구입증빙을 세관에 제출해야 합니다. 원재료명세서(BOM : Bill of Materials)라는걸 만들어야 하구요, 각각 원/부재료의 구매영수증도 첨부해야 합니다.
드라마에서 원인터 울산공장 직원이 "섬유는 한국산, 중국산 섞어썼고예, 부자재는 대만산 썼습니더" 라고 하는 대사를 들을 수가 있는데요. FTA 협정서를 보면 전체 원재료 중 일정 비율 이상이 한국산이어야지만 완성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접근해야됩니다. 아까 설명했던 HS코드가 변경하는 것을 기준으로 둘수도 있고, 부가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기준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HS코드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쉽게 설명하면 주 원재료의 HS코드의 앞 6자리가 123456인데 완성품의 HS코드가 789012 라고 한다면, 이 HS코드 변경에 따른 제품 변화를 설명하기 매우 쉬워지죠. 이 경우 한국산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여하튼, 오 과장과 김 대리가 울산과 서울을 왔다갔다 하면서 이걸 증명하기 위해 많은 서류들을 뒤집니다. 그리고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품목별 원산지인증수출자 인증서'를 받아서 끝내 해결을 하게 되죠. 그런데 말입니다. "품목별" 이라고 하는 말이 붙는걸 봐서 뭔가 다른게 더 있을 것 같지 않나요?
원산지인증수출자 제도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품목별. 그리고 업체별. 품목별은 말 그대로 각 품목 마다 인증을 받는 방법입니다. 품목이 하나 추가될 때마다 저 귀찮은 작업들을 해야되는거죠. 그런데 업체별 인증수출자로 인증이 되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업체 전체가 인증수출자로 인정이 되었으니 말이죠. 대신 이 업체가 판매하는 모든 제품이 FTA 규정을 준수하는 한국산이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할 책임이 뒤따르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을 별도로 도입해야 합니다 (이게 비용이 좀 많이 들어서 잘 안하려고 해요). 드라마를 보면 원인터는 직접 공장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품목별이 아니라 업체별 원산지인증수출자 지정을 검토해봤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이게 돈이 많이 들어요. 그래서 안받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죠.
더 아쉬운 부분은 이겁니다. 체코의 바이어가 한-EU FTA를 적용받을 수 있도록 인증서를 달라고 하는데, 사실 이건 인증서를 전달하면서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EU FTA의 경우, 수출자가 상업송장 (Commercial Invoice; 그냥 흔히 인보이스 라고 합니다)에다 아래의 문구만 추가하면 되는 끝나는거죠.
The exporter of the products covered by this document (customs authorization no. "세관에서 받은 업체별/품목별 인증수출자 인증서 번호") declares that, except where otherwise clearly indicated, these products are of KOREA preferential origin.
인보이스에 위의 문구만 추가하면 끝납니다. 물론 그 전에 인증수출자 인증서를 확보해야겠지만요. 드라마에서 꼭 인증서를 제출해야되는 것 처럼 비춰진게 아쉽습니다. (저도 유럽쪽으로 수출 안해봤으면 어차피 몰랐을 일이니 드라마 작가진들한테 뭐라 그럴 필요는 없지만요)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자기 회사에서 직접 생산한 제품을 유럽에 판매하고 있다면 "업체별" 인증수출자 인증을 한번 검토해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비록 비용도 들고 관리도 꼼꼼하게 해야하지만, 품목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인증 진행하는 스트레스... 그거 무시 못합니다. 제가 지난 5년간 미치도록 했던게 이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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