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시작한지 정확하게 만 7년하고 19일 지났다. 친구들이 굉장히 신기해 한다. '니가 이렇게까지 길게 직장생활 할거라곤 난 생각 못했다' 라는 대답이 주를 이루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저 머리만 긁적인다. 그랬다.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내 전공은 '국제관계학'. 솔직히 말하자. 밥 빌어먹고 살기에는 팍팍한 공부다. 예전 내 지도교수님들도 그러셨다. '이쪽 분야로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건 보따리 장수 (*업계용어다. 시간강사를 자조적으로 부르는 용어) 생활을 길게 할 수도 있다는걸 감내해야한다'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 이 전공을 고른건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나이에 무슨 큰 뜻이 있었겠는가. 사학과를 가고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순수 인문학보다는 그래도 사회과학이 '그나마' 먹고 사는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깨닫기 까지 5년이 더 걸렸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그냥 흔히 말하는 '먹고대학생' 이었다. 맨날 술술술. 그런데도 수업 안 빼먹고 잘 듣고 심지어 재미까지 느낀건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도 졸업 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던 시기였다.


그러던 내가 공부를 하고싶다고 느낀 순간은 아이러니 하게도 투병생활 중이었다. 이제 10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니까 아무렇지 않게 말 할 수 있는 얘긴데, 군생활 도중 'Sarcoma (악성종양)' 가 발병됐다. 왼쪽 허벅지에. 병원에서 쓰는 용어로 '좌측 대퇴부 악성종양'. 전신마취를 하는 큰 수술을 두 차례 겪었고, 휠체어를 석달간 타고 다녔으며 암병동에서 6개월간 생활했다. 다행히 나는 비교적 초기에 잡아낸거라 지금까지도 잘 살아가고 있다. 8인실 병동이었다. 내 옆 침대에는 정말 오늘내일하는 말기암 환자들이 있었고, 같은 병실 내에 머리카락이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다들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난 그냥 방사선 치료만 받았으니까. 매일 오전 한 시간 가량의 방사선 치료를 받고 나면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었다. 낮잠도 게임도 어느 정도가 지나면 지겨워졌다, 그 때였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수술 직후를 제외하고는 병실에 혼자 있었다. 보호자 없이) 전공책들을 보내달라고 한 것이다. 친구들에게도 부탁했다. 휠체어를 타던 시절이라 활동에 제한이 있어서였을까. 전공서적들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6개월간 읽은 그 두꺼운 전공서적들이 그 이후 3년간의 대학생활 동안 읽은 전공서적보다 많았을거다.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되었다. 진로에 대해 슬슬 생각해봐야할 때. 명색이 '국제'관계학 전공자인데 해외에서 공부는 해봐야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교환학생 준비를 했다.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영국이 끌렸다. 다른 곳들은 1년 동안 파견이 가능하지만 영국은 6개월만 가능함에도 왠지 모르게 끌렸다. 그리고 IELTS (영국 및 영연방에서 토플 대신에 보는 시험. 물론 영국에서도 토플은 인정된다) 시험 준비를 하고 6개월의 준비 끝에 간신히 IELTS 점수를 획득, 그리고 영국 Aston 대학의 College Language and Social Science로 6개월간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그렇게 영국생활의 꿈에 부풀어 있던 그 때, 비보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그랬다. 아버지는 이미 신부전증으로 인공투석을 받고 있던 몸이었다. 사실 그 전에도 몇 번 쓰러지셨던 적이 있었지만 서울에 혼자 있던 나에게, 가족들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갑자기 대구로 내려오겠다는 이야기를 할까봐. 고민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영국을 정말 가야 하는 것인가. 내가 투병생활을 할 때, 알게 모르게 아버지는 내 걱정을 참 많이 하셨다.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아버지와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가 '젊은 나이에 이런말 해서 미안한데 (그때 나는 겨우 스물 둘이었다) 이번에 수술 하고 나면 근육을 많이 절제해야돼요. 생활은 하겠는데, 뛰는건 이제 못할지도 몰라요'


나름 장남의 굴레를 짊어지고 살던 나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아버지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었다. 의사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길.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토록 펑펑 울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잠시 나쁜 말 좀 할게요. 씨발, 이걸 쓰면서도 눈물이 난다. 진짜)


그 때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펑펑 울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 

그래서 난 아버지에 대해 마음의 짐을 아직도 짊어지고 있다. 아버지 건강이 저렇게 된 건 다 내 탓이라고. 내가 건강하지 못했던 탓이라고.

그래, 가족이 우선이야. 영국은 무슨... 하고 있던 찰나.

모 금융사에서 교환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데 거기에 선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엄마와 동생에게 알렸다. 엄마가 그랬다. '니가 영국을 안가면 아버지 마음이 어떻겠느냐. 장학금도 받는 판에 가족 걱정하지말고 가라'


내 주변 인물들도 모르는 이야긴데, 이 즈음해서 한 교수님에게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교수님이 아직 기억하실지는 모르겠다)

'너 공부할 생각있냐? 좀 특이하긴 할텐데... 내가 스웨덴 쪽이랑 공동 연구를 진행하려고 해. 니가 거기서 공부하면서 내 연구도 도와주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 장학금은 받을 수 있을거야. 물론 초기 정착 비용이 좀 들거고 생활비도 일부 보조는 되겠지만 어느 정도 펀딩이 필요하긴 할거야.'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는 답변을 하고 자리를 떴지만, 내가 그 교수님께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영국에서의 6개월으로 만족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6개월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6개월간 단 한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깎음과 동시에 나는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공식적으로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안녕이 되는 순간이었다. 흔히 말하는 스펙이라고는 오픽(OPIc - 영어 말하기 시험) 성적 하나와 나쁘지 않은 졸업평점 밖에 없었다. 참 원서 많이 썼다. 나중에 세어보니 10개월간 120개 정도의 원서를 썼더라. 면접도 많이 봤다. 어느 한 회사에서는 신체검사까지 마쳤는데도 최종 탈락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게 두 곳이었다. 보험회사. 연봉은 꽤나 많이 준다고 했다. 단, 대구로 내려가는 조건. 나머지 하나가 상사였다. 연봉은 보험회사보다 세전 천 만원이 적었다. 고민이었다. 현실 따지면서 돈 많이 받고 가족 챙기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국제'라는 말이 들어가는 전공을 했는데 해외도 좀 돌아다니고 하는 일을 해볼 것인가. 이번에도 엄마는 '돈이 중요한게 아니다. 니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해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상사에 들어갔다. 첫 직장이 상사다보니 여전히 그 원죄(?)로 상사에 다니고 있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인생이란게 다 그런건가 싶다. 인생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공부란걸 다시 해보고 싶다. 그게 꼭 국제관계학이 아니라도 좋다. 그러지 않으면 죽기 전에 평생 한으로만 남을 것 같다.


p.s. 석사과정 수료만 하고 아직 학위 못 딴 동생아. 오빠의 부탁이다. 제발 논문 쓰고 석사 따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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